Run DMC

런디엠씨 Run DMC

박서엔진 2013. 1. 3. 13:55

조셉 시몬스(Joseph Simmos)

1964년 11월 14일, 미국

잼 마스터 제이(Jam Master Jay)(본명:Jason William Mizell)

1965년 1월 21일 ~ 2002년 10월 30일

대릴 맥다니엘스(Darryl Lovelace)

1964년 5월 31일, 미국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1980년대에 뉴욕 빈민가 출신의 가수들에 의해 선보여진 랩 음악은 서민 계 층과 중산층 계층에게서 사랑을 받으며 런 디엠씨(Run D.M.C.), L.L. 쿨 제 이(L.L. Cool J)같은 스타들을 배출해냈다. 그 중 특히 런 디엠씨는 랩 음 악이 흑인들만의 향유 음악에서 벗어나 전 세계 팝 팬들에게 세력을 떨치 게 된 1980년대 중반에 가장 큰 인기를 모았던 그룹이다. 런 디엠씨의 멤버 조셉 시몬즈와 대릴 맥대니얼스는 뉴욕 퀸즈 지역의 안락 한 환경에서 성장했다. 뒤에 시몬즈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와의 인터뷰에 서 자신들이 받은 양육 방식은 런 디엠씨의 팬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부르 짖게 해주었다고 밝힌바 있다. `(대도시에 사는) 우리 팬들 중에 일부는 사는 지역과 부모들이 그들에게 전혀 긍정적인 면을 안겨주지 못한 관계로 매사에 긍정적이질 못합니다. 나 는 중산층 가정 출신이고 또 우리 부모님들은 모범적인 분들이셨습니다. 옳 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된 열 살 때부터 나는 항상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왔습니다.` 시몬즈와 맥대니얼스는 십대 때부터 랩 음악 활동을 했다. 시몬즈는 열세 살 때 이미 코모도스(Commodores) 콘서트에 출연해 `커티스 블로우(Kurtis Blow)의 아들`로 소개되며 랩 스타 커티스 블로우의 무대에 올랐다. 그 뒤 그는 세인트 존스 대학에 진학해 사회학을 공부했다. 런 디엠씨의 멤버들 은 모두 같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시몬즈와 맥대니얼스가 랩 음악 활동을 해 나간 반면 제이슨 미젤은 십대 시절 클럽의 DJ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. 그러다가 셋은 한데 뭉쳤고 미젤은 잼 마스터 제이(Jam Master Jay)라는 이 름을 자신의 예명으로 쓰게 되었다. 1980년대 초 런 디엠씨는 뒤에 뉴욕 지역 디스코 랩 댄스 음악 레코딩의 주 요 세력으로 성장하는 Profile 레코드사에서 첫 음반을 만들었다. 첫 싱글 곡인 `It`s Like That (And That`s The Wat It Is)`는 1982년 흑인 음악 차 트 Top 10까지 올라갔고 그 뒤 6개의 레코드가 차트에 더 올라갔다. 그 중 에는 런 디엔씨의 데뷔 앨범 [Run D.M.C.](1983)도 포함되어 있다. 이 앨범 에서 커팅된 싱글 `Rock Box`는 1984년 중반 이십만 장이 팔렸다. 또한 런 디엠씨는 순회 공연과 `Soul Train`, `Graffiti Rock`, `Entertainment Tonight`과 같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팬의 수를 늘려갔 다. 1984년 한해동안 런 디엠씨는 Fresh 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뉴 욕 출신인 커티스 블로우, 후디니(Whodini), 뉴클러스(Newcleus) 등의 랩 그룹과 함께 미국 내 29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을 벌였다. 이들의 공연은 랩과 댄스가 함께 벌어지며 무대 위에는 랩퍼들과 DJ들, 매그니피션트 포스 (Magnificent Force)같은 브레이크 댄스 그룹들이 출연했다. 1985년 초 Profile 레코드사에서는 런 디엠씨의 두 번째 앨범 [King Of Rock]이 나왔다. 런 디엠씨가 랩 음악의 선두 주자가 되는데 이 앨범의 히 트는 단단히 한몫을 했다. 1986년 5월에 나온 [Raising Hell]도 골드를 기 록했다. 이 앨범에는 런 디엠씨 멤버들이 록 밴드 에어로스미쓰(Aerosmith) 의 스티븐 타일러(Steven Tyler), 조 페리(Joe Perry)와 함께 부른 록 음 악 `Walk This Way`의 리메이크가 실려 하드 록과 랩의 조화를 선보였는데 이 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했다. (이는 인디 레이블에서 발표된 앨범으로서 는 극히 드문 경우다) 1986년 여름 대규모의 청중들을 상대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질 때만 해도 런 디엠씨의 장래는 장미빛으로만 보였다. 그러나 1986년 8월 17일 캘리포 니아의 롱 비치 지역에서 가진 공연이 악의를 지닌 갱단의 폭력 행위로 인 해 엉망이 되는 바람에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샀고 그 해 9월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이 후원해주기로 했던 스트릿 페스티벌 공연을 포함한 여러 개의 공 연이 취소됐다. 런 디엠씨 멤버들과 미 전역의 팬들은 그같은 갱들의 난동에 대해 지역 치 안의 부재가 빚어낸 결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. 그러나 런 디엠씨는 노래 가사에까지 이를 내뱉지는 않았다. 앨범 제목은 [Raising Hell]이지만 이들 은 약물과 폭력을 삼갈 것과 교육의 중요성을 노래했다. 시몬즈는 이렇게 말했다. `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듭니다. 애들은 내게 이 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. `저는 예전엔 학교를 잘 안 갔었는데 지금은 결석 안 해요. 왜냐면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바라는 바가 이런 거라는 걸 알게 됐 거든요.` 이런 얘기를 들으면 흐뭇해지지요.` 한편 미젤은 이렇게 말했다. `갱단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은 우리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지 모르 지만 그런 갱단을 우러러보는 애들은 우리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. 그 애들 은 갱단보다 우리를 더 우러러보고 갱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지요.` 1986년 말부터 87년까지는 공연시 아무런 소요도 일어나지 않았고 런 디엠 씨는 롱 비치 사건은 잊고 미래의 계획에 의욕적으로 임하는 듯이 보였다. 런 디엠씨 멤버들은 1986년에는 공연 활동 외에 `Tougher Than Leather`라 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에도 출연했다. 그런데 새 앨범 발매와 함께 영화를 개봉하려던 계획은 런 디엠씨와 Profile 레코드사간에 법정 분쟁이 제기되 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. 영화는 1987년에 완성이 됐으나 법정 공방은 여 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. Profile 레코드사와 출판 등록 대행업체인 Protoon사는 런 디엠씨의 매니지 먼트 관리 회사 Rush 프로덕션(조셉 시몬즈의 형 러셀이 창립)측에 의해 미 지불한 로열티 및 출판 수입으로 6백 80만 달러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걸 렸다. 한편 Profile 레코드사 측은 그 해 8월 Rush측을 상대로 2백만 달러 배상 청구를 들고 나왔으며 런 디엠씨를 타사 레이블로 이적시킨 혐의로 러 셀을 고소했고 1986년 10월 1일에 나올 예정이었던 새 앨범의 발매 무효 및 계약 파기를 주장했다.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런 디엠씨는 같은 랩 그룹으로 1987년 [Licensed To Ill] 앨범으로 4백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런 디엠씨의 아성을 위협한 비스티 보이스(Beastie Boys)와 함께 세계 순회 공연을 가졌다. 1987년 말부터 1988년 초까지 런 디엠씨의 새 앨범에 수록된 `Papa Crazy` 가 큰 히트를 했다. 그러나 새 앨범의 정식 발매가 유보되어 1988년 초까 지 이 노래를 제대로 구해 들을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. 드디 어 1988년 봄 [Tougher Than Leather] 앨범이 정식 발매됐고 그 해 말 영화 도 개봉할 수 있었다. 1991년 말에는 그때까지의 히트곡을 모은 [Greatest Hits 1983-1991] 앨범 이 Profile 레코드사에서 발매됐다.